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크의 메리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233px-Family_of_Teck.jpg|width=100%]]}}} || 1867년 5월 26일, [[켄싱턴 궁전]]에서 당이모인 [[빅토리아 여왕]]이 태어났던 방과 같은 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천상혼]] 가문 출신인 [[프란츠 폰 테크|테크 공작 프란츠]]였다. 할아버지였던 뷔르템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작은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방계 왕족[* 알렉산더 공작의 할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으로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에게는 여러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 장남이 훗날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초대 왕이 되는 프리드리히, 차남이 알렉산더 공작의 아버지, 루트비히 공작이었다. 뷔르템베르크가 왕국으로 승격되기 전에 태어난 공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뷔르템베르크 공작 (Duke/Duchess of Württemberg)을 칭했고 뷔르템베르크가 왕국으로 승격된 이후 태어난 왕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뷔르템베르크 공/공주 (Prince/Princess of Württemberg)를 칭했다. 참고로, 뷔르템베르크 왕가는 왕국 멸망 직후인 1921년에 직계가 끊어져 방계인 알츠하우젠 분가(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의 7남 계통이다.)가 새롭게 종가가 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남계 후손은 모두 뷔르템베르크 공작을 칭하고 있어 현대에는 더 이상 이런 구분이 사용되지 않는다.]이었으나 할머니 클라우디아는 통치 가문의 후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로 [[조지 3세]]의 7남 [[아돌푸스 프레드릭]] 왕자의 막내 딸이였다.[* 메리 애들레이드는 영국의 공주였기 때문에 [[귀천상혼]] 가문이 아니라 더 좋은 가문으로 시집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팻메리 "Fat Mary(뚱뚱한 메리)"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 뚱뚱해서,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결혼을 하지 못했다. 결국 사촌 빅토리아 여왕이 적극적으로 신랑감을 찾아주어 테크 공작과 결혼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켄싱턴 궁전]]에서 자랐으며, [[에드워드 7세|앨버트 왕세자]]의 자녀들과 또래였기 때문에 종종 어울려 놀기도 했다. 어머니 [[메리 애들레이드]]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 했고, 메이에게 빈민가를 방문하게 하는 등 여러 자선 활동을 경험하게 했다. [[조지 3세]]의 증손녀로서 [[영국]]의 왕족이긴 했지만 [[귀천상혼]] 가문의 공녀였기 때문에 재산이 거의 없었다.[* 적어도 영국의 상속 체계는 남성 장자상속제이기 때문에, 혈통상 상속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머니 테크 공작부인이 외할머니인 케임브리지 공작부인으로부터 매년 돈을 받긴 했지만, 함부로 많은 자선 단체에 기부를 해 버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했다. 결국 테크 공작은 많은 빚에 시달렸고 1883년 돈을 절약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지내야 했다. 그들은 잠시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메이는 그곳의 예술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1885년에 메이의 가족은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고, 이후 메이는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지냈다. 또한 이모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대공비 아우구스타와도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메이는 거의 평생을 그녀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